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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clarise martin 2016. 4. 2. 04:30

                                                                                                                                                       



 

 

 

                                                                                                                                                       

 

 

 

 

 

 

 

 

 

초등학교 시전 친구들이 펑펑 울었다고 하는 책이었다.

그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한국 작가의 책은 잘 안 읽었고 서양 작가들에 푹 빠져있었다.

그 흔한 인터넷 소설이나 연애소설은 안 읽었다.

그렇게 가끔 추천도서에 올라오던 이 책을 20살이 넘은 지금 읽게 되었다.

10년도 차이 안 나는 중학생의 말인데 왜 이렇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이 책을 읽은 그 어렸던 내 친구들은 무슨 생각으로 읽었을까?

멋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읽던 도중 한 인물에 눈이 갔다.

엄마와 재혼한 유미의 새 아빠이다.

분명 앞부분에 엄마의 상황에 세상 사람들과 너무 틀린, 밝고, 천진한 새 아빠를 만났다고 했을 때도 그러려니 넘겼다.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새 아빠라고 부르는 딸에게

그래야 원래 아빠랑 구별이 되지, 아주 합리적인 호칭이야, 거기다 난 무조건 새 것을 좋아하거든, 헌 것보다....”라는 말을 해주는 새 아빠였다. 

새 아빠라는 사람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무겁지 않게 솔직한 딸의 엄한 말에도 웃으며 얘기해주는 사람.


 

 

두 번이나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했다. 일요일이면 놀이공원에 가거나 외식을 했고, 아빠는 회사를 다녔고, 엄마는 살림을 했다. 두 번째에는 다 동일한데  여전히 일요일로 시작됬다.

어린아이가 생각하는 합리화라는 것일까.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시체 놀이를 하다가

시체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한 재준.

죽다 살아 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느낀다.

아침에 자리에서 깼을 때, 나는 이미 죽었어, 하고 생각했더니 눈앞에 펼쳐진 하루가 한없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학교도 당장 달려가 보고 싶었고, 아침부터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퍼붓는 아빠도 재미있게 여겨졌고, 새로 산 내 나이키운동화를 몰래 신고 나가 진흙을 묻혀 온 인준이도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죽은 사람에게 나이키 운동화쯤이야 하찮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점차 여자아이 하나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는게 과연 좋은 일일까 생각이 되었다.

마지막 읽기까지 읽은 유미가 자신의 친구가 그만큼 좋아했구나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보면서 어린시절에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알수 없는데.. 그것 때문에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 구나. 싶었는데 유미의 행동을 보면서 아이들이 아무리 친구를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해도 그렇게 받아드리는 게 좋은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이런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면 글쓴이의 이야기를 듣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말을 읽지않는 것 같더라..)

 

 

작가의 말 중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원했던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하고, 아늑한 삶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주위에는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어이없이 사라져 간 소년들이 뜻밖에 많았습니다.

이미 사라져 간 그 소년들에게 유별나고, 극적이고, 고통스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어디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스미지 못하는 그런 평화롭고 사소한 시간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 소년들이 이 글 속에 머물러 아기자기한 삶의 한 자락, 잠시나마 누리다 갈 수 있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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